2007년 1월호 목차

 

 

 

 
 

 

 

 

 

  

 

 

새해 연재 기획-「증언」
한국전자정보산업 이면사

Ⅰ. 여명기/ 송태욱
.....임태순과 실리콘 산업(1)

심 차관의 호출

『따르릉』
1974년 봄. 서울 구로수출산업단지(현 구로디지틀산업단지) 안에 있는 한국정밀기기센터(Fine Instrument Center) 2층에서 송태욱(宋泰昱) 전자기술 이사가 전화를 받았다. 상공부 심의환(沈宜煥) 차관이 급히 오라는 전갈이었다. 연락을 받고 광화문 네거리 뒤에 있는 상공부 차관실을 들어서니 친척 아저씨처럼 자상한 얼굴의 심 차관이 반갑게 맞으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송 이사, 청와대 육영수 여사께서 서강대학의 임태순(任太淳) 교수 자문을 받아 전자시계 수출 문제를 검토해 주기 바란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 알고 잘 협조해 주시오』라고 말을 했다.
임 교수는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로 4년 동안 박근혜 학생(후일 한나라당 대표 역임)을 지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육성 의지가 굳건했지만, 자신의 맏딸을 엔지니어로 만들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었다.
얼마 전 박 양의 졸업논문 자료를 거들어 준 일이 있는데, 막상 이를 수출에 연결하여 실행해 보라고 하니 송 이사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자 심 차관은 『임 교수는 FIC 이사장 자리나 넘볼 사람이 아니니, 이춘화 이사장에게도 잘 말씀드리시오.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하며 간곡히 당부했다.
당시 FIC는 1969년에 공포된 전자공업진흥법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국립공업연구소(NIRI)와 함께 전자공업 진흥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송 이사는 센터로 돌아 와 이춘화(李春和) 이사장(예비역 육군 소장)에게 내용을 보고했다. 그러나 막상 임 교수에게 제공할 방이 마땅치 않아 우선 송 이사실에 책상을 들여 놓고 1주일에 3번씩 출근하기로 했다. 직책은 전자공업진흥법 12조에 의해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반도체분과위원장을 맡도록 했다.

두 가지 구상


임 교수는 인품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반도체 이론을 대학에서 강의했고, 또 그 애제자(愛弟子)로 대통령 따님을 데리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 같으면 거들먹거리기 쉬운 그런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낮췄다.
그러나 자기 생각은 뚜렷하여 간혹 학생 가정 방문차 청와대에 들어 갈 경우,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여 영부인과 박 대통령이 즐겁게 귀담아 듣는 대상이었다. 그 같은 임 교수가 반도체 공업을 육성하겠다고 산학협력의 광장으로 뛰어 들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기에 족했다.
임 위원장이 생각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앞으로 수요가 많을 전자시계를 값싸게 생산하여, 스위스가 시계공업으로 세계를 휩쓸었듯이 전자시계만은 우리가 석권해야겠다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실리콘 재료 산업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당시 모토롤러·시그네틱스·페어차일드, 그리고 일본 도시바와 대한마이크로·아남산업·고미산업 등 세계적 반도체 조립 공장이 대부분 한국에 있었으나, 반도체 원료인 규사는 한국산이 순도 높고 품질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업체들이 갖다가 정련해 쓰고 있었다. 실리콘 반도체의 처음과 마지막 공정이 우리 손에 있으므로, 그 중간 공정인 실리콘 제련 사업과 웨이퍼 패브리케이션을 보완하면 한국은 세계 제일 가는 반도체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찬 기대였다.
반도체분과위원으로는 한국반도체의 강기동(姜起東) 사장, 아남산업 계열 앰코어의 김주진(金柱津) 사장, 대한마이크로의 최만립(崔萬立) 사장과 서울공대의 이정한(李晸漢) 교수, KIST 반도체연구실장 김만진(金晩振) 박사 등이 주로 참여했으며, 처음에는 월 1회 정도 회의를 열었으나, 워낙 검토할 문제가 많고 보니 매주 개최키로 하였다.
회의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반도체 전용공단을 김포 국제공항 근처에 조성하고, 생산 제품을 당일 항공편으로 세계의 주력 시장에 내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안 등이 논의되었다.
강기동 박사는 『최근 세계적 조류가 C-MOS 기술로 나아 가고 있으므로, 한국반도체의 생산 순위를 바꿔 이 칩을 우선 공급하겠다』고 말하였으며, 기타 부품 공장 등의 유치 문제도 검토했다.
이 당시 서울 홍릉에 있는 KIST의 안병성(安柄星) 박사가 마침 탁상 전자계산기를 개발하여 민성전자로 하여금 조립 수출토록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들어 가는 반도체를 미국 로크웰에서 전량 공급받았다.

최초의 한국 반도체 공장

그런데 전탁 수출이 잘 되다 보니 로크웰 스스로가 이 사업에 뛰어 들어 결국 민성전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자 손목 시계를 육성하려면 먼저 C-MOS 칩을 생산해야 된다는 강 사장의 주장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한국반도체는 그해 연말 공장을 준공하고 6기능 전자 손목시계용 C-MOS 칩을 생산해 냄으로써 미국과 거의 같은 때에 LSI 칩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년 반만에 오하이오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모토롤러 생산기술 부장으로 근무했던 강 박사의 한국 생활은 매우 불편했다. 본인 스스로가 격식과 관례를 가리지 않는 성격인 데다 아이들 학교 문제 등 어려움이 중첩되어 결국 가족을 미국으로 다시 들여 보내 놓고 있었다.
강 박사는 한국반도체공업 주식회사를 경기도 부평군 도당면에 설립하고, 미국에 ICII라는 기술 전담 회사를 둠으로써 실리콘 밸리 지역에서 최신 기술 정보를 도입하는 시스템을 갖췄는데, 지금은 이같은 일이 거의 보편화됐으나, 당시 국내 산업계에서는 최초 케이스였다.
『한국에서 웨이퍼 팹 사업이 정착되면 나는 미국으로 들어 가겠다. 그리고 해마다 우수한 인재 5~6명씩을 내게 보내 주면 실리콘 밸리에서 훈련시켜 돌려 보내겠다. 미국에서는 반도체 기술자들이 자기 회사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반도체 산업 전체의 발전을 생각하므로 퇴근 후 서로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게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전자시계 생산에 많은 업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대한마이크로의 최만립 사장은 미국 AMI와 합작 회사를 설립하고 시제품을 냈으며, 올림포스전자·한독시계·민성전자 등이 새로 참여했다. 최 사장은 미국 제너럴 타임과 반도산업 주식회사를 합작시켜 GT코리아도 설립하고 전자시계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전자시계 세계시장 장악 목표

당시 전자시계의 전세계 수요 전망은 1974년 30만 개에서 76년 300만 개, 1980년에는 5,600만 개로 추정되었으며, 전체 시계 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8% 이상으로 36억 달러가 넘는 조사 수치가 나왔다.
지금 보면 대단한 숫자가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이 22억 달러 정도였으며, 전체 수출 목표가 35억 달러, 그 중에서도 전자제품 목표는 3억5,000만 달러였으니, 전자시계 한 품목으로 실로 대단한 숫자였다. 그러나 임 교수는 우리도 스위스의 시계산업과 같이 전자시계로 2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자는 안을 제시하여 당국자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강기동 박사의 애로 사항은 마스크 공장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데, 한국 측 파트너인 이상규 회장이 그만한 재력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들은 임 교수는 송 이사에게 『아무래도 새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송 이사께서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 측을 알아 보시지오』하고 부탁했다.
때마침 내외경제신문에서 전자산업을 다루는 성의경(成義慶) 기자(현 월간「NewMedia」 발행인)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에 삼성전자의 강진구 사장과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함께 참석하시지오』라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조선호텔 앞 양식당 「포시즌」에서 세 사람이 식사를 함께 했다.
송 이사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강 사장에게 『삼성이 이제 전자사업을 본격화하고 있으신데, 차제에 한국반도체공업 주식회사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임태순 교수께서도 이같은 의향을 갖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성 기자도 그 방향이 바람직하겠다고 힘을 보태 주었다.

강진구의 암중모색

이 때 강진구(姜晋求) 사장은 『나도 군대를 다녀 오느라고 늦게 서울공대에서 강기동 박사와 함께 공부한 일이 있기 때문에 강 박사를 알고 있습니다』고만 얘기를 하고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 후 20년 간 삼성전자 CEO를 맡아 오늘의 삼성전자 기초를 닦아 놓은 강 사장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얼마 후 한국반도체 공장 준공식엘 가 보니 강진구 사장이 임원 한 사람을 데리고 참석했는데 이충수(李忠秀) 이사였다. 송 이사는 강 사장에게 다가 가 『인수에 흥미가 있어서 참석하셨습니까?』고 물었다. 강 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친구 회사니까 구경 좀 왔습니다』고 대답했다.
돌아 오는 차 안에서 『아마 삼성이 인수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고 송 이사가 말을 하자, 임 교수는 『잘 된 일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규 회장이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 사돈간이니 미련을 버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오』라며 여운을 남겼다.
1974년 말 삼성전자는 한국반도체를 정식 인수하고 공동 대표이사에 강기동 사장·강진구 사장, 관리담당 이사에 이충수 씨를 선임했다. 이 때 국내에선 전자 교환 시스템 도입 논의가 일기 시작했고, 새로 참여를 벼르는 삼성으로서는 첨단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국내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 삼성으로 넘어 가자, 선발 기업으로 이름을 떨치며 전자산업을 지배해 온 금성사(현 LG전자)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어느 날 금성사 박승찬(朴勝璨) 사장이 송 이사에게 전화를 해 왔다. 『청와대엘 불려 갔더니 박 대통령께서 금성사는 납땜질만 하며 먹고 사는 회사냐, 단순 조립만 할 것이 아니라 반도체같이 부가가치 높은 산업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디다. 돌아 와서 진원지를 알아 보니 당신 방에서 시작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대학 선생님이 현실을 잘 모르고 아무 이야기나 건의하지 않도록 옆에서 신경써 주시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우선순위 논쟁

그 후 송 이사는 자연스런 자리에서 임 교수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랬더니 임 교수는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을 전개하면 금성과 삼성의 판도가 뒤바뀔 지도 모를 겝니다. 그러니 금성사가 반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터인데 박 사장으로서도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딱한 일이지오』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로서는 금성사가 1972년에 비로소 흑백TV와 냉장고를 생산하기 시작한 후발 업체 삼성에 뒤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도체분과위원회 모임을 가질 때마다 직설적 성격을 지닌 강기동 박사는 『단순 조립이나 하는 업체들이 무슨 반도체 업체냐』라며, 웨이퍼 패브리케이션을 강조했다. 그럴 때마다 아남의 김주진 사장은 『세계 제일의 조립 회사를 만들어 수출에 이바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서곤 했다. 아남산업은 1973년에 반도체(조립 제품) 수출 3,000만 달러를 달성하여 연말 수출의 날에 김향수(金向洙) 사장이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니, 이 회사의 장남인 김주진 사장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국내에 진출하여 조립 공장만 운영하고 있던 대한마이크로의 최만립 사장은 오히려 강 박사를 두둔하며 웨이퍼 패브리케이션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후 최 사장은 서독 실리콘 재료 업체 바커 케미트로닉스의 사장이 한국을 방문토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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