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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증언」
한국 전자정보산업 이면사

Ⅳ.통신산업
第2話 TDX 전자교환기(2)

3차 시험기 완성

메모콜 프로젝트를 거쳐 GTK-500을 개발하는 동안 KIST 내에는 30여 명의 연구 인력이 양성되었다.

교환기 개발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KIST의 방식기기연구실은 안병성(安柄星)·이주형(李周衡) 등

20여 명의 연구원에 불과했으나, 메모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여재흥(余在興)·강진구(姜鎭求)·박항

구(朴恒九) 등 새로운 연구원을 모집하고 타분야 전문가도 차출하여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GTK-500 개발이 끝나고 삼성GTE통신이 설립되자 이주형·강진구·천유식(千有植) 등 20여 명이

삼성으로 넘어 가고, KIST에는 안병성·박항구 등 10여 명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메모콜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 직후인 1974년부터 KIST는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안을 계속 작성

하여 요로에 뿌리며 시분할 전자교환기 국내 개발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건의서 형식으로 된 이들 계획서는 『국가의 신경인 교환기를 외국에 의존함은 산업정책 상으로는 물

론 안보 면으로나 문화 면으로 불가하다』고 지적한 다음, 『지금까지의 공간분할 반전자 방식 연구

를 지양, 시분할 전전자 방식 연구로 전환하고 있는 선진국 예를 따라 우리도 전전자 방식 교환기 자

체 개발에 착수할 시기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구 노력은 1977년 12월 통신기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 연구소가 설립되

자 KIST 방식기기연구실 팀이 그대로 넘어 가 제2 부소장 밑에서 교환기연구 팀을 형성하여 전자교환

기 개발 작업을 계속하였다.

이에 앞서 그 해 10월에는 안병성·박항구 팀이 체신부로부터 100만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시분할 교환

기 개발계획서를 작성했다. 이는 제1 기종인 M10CN 다음에 보급할 교환기는 국내에서 개발하는 시

분할 전자교환기로 한다는 당초 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연구소 팀은 3개월 작업 끝에 장기개발 계획

서를 체신부에 제출했다. 그것이 실제로 전화국에 설치할 국설용 전자교환기 개발 계획의 시초였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새로 발족한 통신기술연구소는 첫해인 1978년에 체신부로부터 3,300만 원의 연구

비를 지원받아 국설용 전자교환기 개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 해는 시외교환기와 EMX 텔렉

스 기종 선정 작업 등이 겹쳐 전자교환기 개발 작업은 지지부진하였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1억 4,800만 원의 연구비가 투입되었고, 또 그 동안 연구소를 떠나 있던 여재흥·

천유식 등이 합류하여 5~6명에 불과하던 연구 인력이 30여 명으로 다시 늘어 났다. 그리하여 통화로

부분은 박항구, 제어 부분은 여재흥, 소프트웨어 부분은 천유식이 맡아 그 해 말에 만들어 낸 것이 96

회선짜리 1차 시험기였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된 국설용 전자교환기였다.

『미흡하나마 교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든 게 1979년 말에 개발된 1차 시험기였어요. 스

위치 부분 등 극히 일부만 국내에서 개발하였고, PCM 장비나 컴퓨터 등은 미국에서 사다 붙여 통화

가 되는 국설용 교환기 1차 모델을 만들었죠』개발 책임자 안병성 부소장의 이야기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80년에는 1억 원을 확보하여 200회선 용량의 2차 시험기를 제작하였

고, 1981년에는 1억6,000만 원의 연구비를 투입하여 500회선 규모의 3차 시험기를 개발하였다.

오명 청와대 비서관의 관심

『1980년에는 시분할 교환기 개발 프로젝트가 없어졌어요, 체신부 담당과장이 지금 전자교환기를 도

입해서 운용하기도 바쁜데 교환기를 개발할 틈이 어디 있느냐고 해서 그 프로젝트가 죽어 버렸어요.

그 때 마침 농어촌용 도입 교환기 시범 기종이라 해서 노던 텔레컴의 DMS-10을 구리에, 스트롬버그

칼슨의 DMO를 원당에 한 대씩 설치해 시험 운용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작업을 우리가 맡게 되었지오.

그래서 농어촌용 교환기 시설 지원 연구비를 받아 그 중 일부는 시설 지원용으로 그대로 쓰고, 나머

지 일부는 융통성을 부려 교환기 개발 프로젝트에 돌려 썼던 거죠』 3차에 걸친 시험기 개발 작업에

줄곧 참여했던 연구원 박항구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때까지 체신부나 연구소는 전자교환기 개발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충분

한 예산과 인원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체신부 입장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전자교환기 도입 기종 선정

과 설치 작업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데다, 1980년대에 접어 들면서 한국통신(현 KT) 설립으로 전

자교환기 개발 사업에 관심을 분산할 겨를이 없었다.

한편 연구소 입장에서는 설립된 지 일천한 데다 연구소 건물도 확보되지 않아 광화문우체국에서 남

산 타워 건물로 옮겨 다니던 때여서 연구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에서 의욕적인 개발계획을 제시하자 체신부는 우는 아이에게 젖 한 모금 주

듯 목을 축일 정도의 연구비를 지원함으로써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1978년부터 시

작된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은 1981년 말까지 4년에 걸쳐 연구비 4억여 원이 투입되어 3차에 걸쳐 시험

기를 제작하였다.

주로 전자교환기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의 기본적인 호 처리

기능 실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0년에 걸쳐 30여 명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였다는 것은 뒷날 TDX를

개발하는 데 좋은 텃밭이 되었다.

특히 3차 시험기는 1만 회선 규모의 최대 용량 설정에 500회선을 실장하여 시험할 수 있는 제반 여건

이 완성되어 1981년도 중 환경 시험까지도 완료함으로써 1982년부터의 5개년 계획 기간 중 정식

TDX-1 개발 프로젝트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1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의 연구비는 24억 원이었고 전자교환기 연구비는 1억6천만 원이었다.

1981년 1월 청와대 오명(吳明) 비서관의 요청에 따라 청와대를 방문한 안병성 부소장과 박항구 실장

은 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이 가능함을 역설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예산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부터 오 비서관의 머리 속에는 전자교환기 개발 사업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삼아야 한다는 생

각이 뚜렷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안병성·박항구 등 개발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해 온 연구원들을

만나 가능성을 타진하는 동안 성공에 대한 확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비록 용량이 작고 성능이 미흡하긴 하지만, 연구소 팀은 이미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개발한 바 있으

며, 또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의욕과 열의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연구 조직 변화

오 비서관에게 전자교환기 개발 필요성을 역설한 또 하나의 인물은 체신부 기획예산담당관 김영도(金

英道)이었다. 4급 행정직으로서 전자교환기에 대해 이렇다 할 식견을 가지지 못한 그가 어느 날 업무

상 자주 만나는 오 비서관에게 브리핑 차트를 갖고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을 설명한 다음, 이 계획 추진

을 위해 체신부 간부들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체신부 간부들을 직접 설득하기에는 과장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그 때 마침 오 비

서관은 전자산업 육성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때여서 자연스럽게 체신부에 검토 지시를 내릴 수 있었

다.

김 과장이 전자교환기 개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구소 측의 전자교환기 개발 책임자인 안병

성·박항구 팀의 로비 활동 결과였다. 그들은 1977년 12월 통신기술연구소가 설립된 이후 체신부로부

터 매년 1억원 내외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런데 1980년에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비가 끊기면서 농어촌용 외국 교환기를 검토 평가하는 과

제로 변경되었고, 1981년에는 연구소 통합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연구소도, 체신부도 이 프로젝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선 체신부 입장에서는 전기통신 사업의 공사화(公社化)라는 국가적 과제가 진행되고 있어 다른 일

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1979년 말 개통된 제1 기종 M10CN 반전자 교환기의 고장이 잦

아 그것의 안정적 운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자교환기 관련 주무 부서인 체신부 기술조정관실에서는 디지틀 교환기 개발 문제는 제쳐 놓

고 이미 설치된 애널로그 교환기의 안정적인 운용에 신경을 곤두 세우다 보니 예산 확보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연구소 측에서는 연구소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환경 변화가 있었다.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인 통

신기술연구소 시절에는 정만영(鄭萬永) 소장 밑에 김종련(金鐘鍊)·안병성·경상현(景商鉉) 세 부소장

이 있었는데, 김종련·안병성 부소장은 하드웨어 분야 전문가로서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개발 실

적을 쌓고 있었다. 특히 안 부소장은 전자교환기 개발에 있어 남다른 실적을 인정받고 있었다.

1981년 1월 통신기술연구소와 전기기기시험연구소가 통합되어 전기통신연구소로 변모하는 과정에

서 두 명의 부소장이 자리를 잃게 되었다. 신설된 연구소는 부소장 자리를 없애는 대신 부소장급에 해

당하는 선임연구부장 한 자리만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임 최순달(崔順達) 소장은 경상현 부소장

을 선임연구부장에 임명하였다.

김종련 부소장은 연구소를 떠났고 매트릭스 시스템으로 구성한 연구소 조직에서 안병성 부소장은 시

분할 전자교환기 개발단장으로 보직되었으나, 여러 가지 불편한 사유로 1981년 4월 대영전자로 이직

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유완영(柳完英)·박항구가 체신부·청와대를 접촉하며 전자교환기 개발을 본격 수행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화를 추진하였다.

사상 최대 개발비 240억 원

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1981년 5월 오명 비서관이 체신부 차관으로 부임한 뒤

였다. 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을 국책 과제로 선정키로 결심한 오 차관은 최순달 소장과 경상현 선임

연구부장 등 전기통신연구소 간부들을 불러 그 프로젝트를 검토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실무자들로

하여금 연구소로부터 소요 예산과 기간 등에 관한 개발계획서를 받아 내도록 하였다.

실무자들은 전기통신연구소에 개발계획서를 제출하게 하는 한편, 전자교환기 개발에 관한 한 1인자

라 할 대영전자 안병성 연구소장에게도 별개의 계획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개발계획서는 그해 8월 안병성 소장이 먼저 제출했다. 개발 기간 5년 동안에 소요되는 총비용으로

124억 원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유완영·박항구 팀이 작성한 전기통신연구소 측의 요구액은 290억

원이었다.

『줄 지 안 줄 지도 모르는 상황이어서 명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집어 넣어 최대한 늘려 놓

은 게 290억 원이었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이야기였다.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나중에는

서로 비난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두 계획서를 가지고 체신부에서 다듬은 결과 240억 원이라

는 수치가 나왔고, 그것을 제5차 5개년계획에 삽입함으로써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

연구개발비 240억 원 프로젝트. 비록 5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천문

학적인 숫자였다. 군 장비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10억 원대의 프

로젝트도 구경하기 힘들었으므로 240억 원 프로젝트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두 연구소를 통합하여 발족한 전기통신연구소의 1981년도 연구개발비가 24억 원이었고, 그

중 전자교환기 개발에 투입된 연구비가 1억6천만 원에 불과했는데, 단일 품목의 전자교환기 개발에

매년 50억 원을 쏟아 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1981년 전기통신연구소의 전자교환기 개발 팀은 너무 빈약하였다. 시분할 교환기 개발사업단장 자리

는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이 겸임하였고, 실제로 연구개발 업무를 추진할 교환연구부장에는 유완영이

임명되었으며, 그 밑에 10년 가까이 그 업무를 담당해 온 박항구·여재흥·강진구 등이 포진하고 있었으

나 240억 원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가기에는 너무 빈약한 팀이었다.

따라서 마땅한 책임자가 없을까 하고 고심하던 중 떠 오른 사람이 양승택 박사였다. 몇 달에 걸친 전

기통신연구소·체신부·KTC 간 협의 끝에 1981년 10월 양승택 박사는 삼성 그룹에서 전기통신연구소

로 돌아 올 기약도 없는 장기 출장을 떠나 시분할 교환기 개발단장 자리를 맡았다. 그가 부임할 때에

는 26명의 연구 팀이 구성되어 있었다.

국내·외 업체들의 반대

그러나 그 때까지 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에 대한 최고 결정권자인 최광수(崔光洙) 체신부 장관

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전자교환기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주위의 의견을 들어 판단을 내

릴 수밖에 없는데, 주위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체신부 간부 중 오명 차관의 적극적인 개발론에 동조하는 사람은 배호원 기획관리실장과 김영도 기획

예산담당관에 불과했다. 담당 사무관 김부중(金富中)이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해 모르

기로는 그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기술직 가운데 김노철 등 몇몇 과장급이 찬성하였으나 그렇

게 비중 있는 의견은 아니었다.

산업계의 의견도 극히 부정적이었다. 이제 겨우 외국 애널로그 전자교환기를 들여 와 조립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 디지틀 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심은 다른 데 있었다. 기존 기계식 교환기 독점 생산으로 누리던 특혜를 잃은 뒤 막

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 전자교환기를 도입하여 이제 막 재미를 보기 시작하려는데, 또 다시 얼마나 많

은 비용이 소요될 지도 모르는 국산 전자교환기를 개발하자고 나서니 반가울 리 없었다.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가치를 인식한 최순달 소장은 화끈한 성격대로 이 프로젝트 추진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24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가 확보된다고 하니 연구원들로서

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 의지를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는 비단 체신부 주변에서만 물의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국회에서도 그

개발 가능성과 개발비 규모를 가지고 논란을 일으켰다. 어느 날 황인성(黃寅性) 국회 교체분과위원장

이 최순달 소장을 불러 따졌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하는데,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할 수 있다고 합니까?』

『벤츠가 좋은 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포니에 비하면 벤츠는 확실히 좋은 차죠. 외국 사람이

우리에게 팔려고 하는 교환 기종은 자동차에 비유하면 벤츠 같은 겁니다.

오늘날 우리 농어촌에서 전화 한 번 걸려면 이장집에 뛰어 가 신청해 놓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며,

때로는 통행 금지 시간에 전화가 걸려 와도 그것을 받으러 뛰어 가는 상황인데, 벤츠 같은 좋은 교환

기가 왜 필요합니까.

자동차로 얘기하면 포니 같은, 말이 통하는 교환기로 충분한 것 아닙니까. 그처럼 말이 통하는 교환기

로 시작해서 기술이 축적되면 더욱 좋은 교환기를 개발하는 것이 기술 발전 순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찬반 의견이 분분하였기 때문에 최고 책임자 입장에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1981년 말 240억 원의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가 담긴 제5차 5개년계획이 확정되었는 데도 계속 성

공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거쳐 1982년 2월 전기통신연구소 간부들이 개발을 확실히 성공시키겠다는

연명의 각서(일명 TDX혈서)를 체신부에 제출함으로써 개발 프로젝트는 확정되고 제5차 경제개발 5

개년계획 1차 연도인 1982년부터 본격 개발이 추진되었다.

1982년 5월에는 체신부 장관이 경질되어 뜻 밖에도 전기통신연구소장 최순달 박사가 체신부 장관으

로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하면서부터 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 사업이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연구소를 찾아 와 개발 사업 진도를 보고받고 연구원들을 독려하였으며 한국통

신 측에는 협조를 당부하였다. 오명 차관도 틈이 나는 대로 연구소를 방문하여 연구원들을 격려하였

다.

최순달 장관과 양승택 박사


1981년 제작된 500회선 용량의 3차 시험기에 소프트웨어를 추가하여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1982년 초였다. 생산 경험이 있는 양승택 단장은 3차 시험기에 대해 여러 가지 기능·성능 시험을 지시

하였고, 연구소가 미처 검토치 못한 고온도 시험 등 환경 시험도 실시하여 점점 제품화 개념에 접근하

고 있었다.

그 해 7월 연구소는 이 시험기를 용인군 송전우체국에 설치하여 가입자 362명을 대상으로 시험 운용

을 하였다. 고장이 날 경우에 대비해 기존 자석식 교환기와 전화기는 그대로 두고 가입자들에게 새로

운 전화기를 달아 주며 성능 시험을 하였다.

원래 실험실용으로 개발한 교환기를 운용 현장으로 끌고 나가 실제로 작동시킴으로써 고장률이 얼마

나 되고 신뢰도는 어느 정도인 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당초에는 설치 장소를 판교로 잡았는데, 한

국통신 측의 반대로 거기보다 가입자가 적고 후미진 곳인 송전으로 옮겼다.

개통식 날 몹시 비가 내리고 천둥까지 쳤다. 그러다 며칠 후에는 벼락이 떨어져 교환기 보드를 태워

버렸다. 개통하자 마자 자연 낙뇌 현상이 교환기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 3차 시험기는 노던 텔레컴의 DMS-10 기종을 대체할 것으로 설계 했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용량

이 커야된다고 해서 8천 회선으로 잡았지만, 송전에서 시험하기 위해 500회선만 제작했던 겁니다. 그

런데 개통식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이 치다가 며칠 후에는 낙뢰가 떨어져 보드가 타 버리는

등 야단법석이 났어요. 그 때부터 국산 교환기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물건이 아니라는 개념을 심어 주

었던 거죠』 연구원 박항구의 말이었다.

개통식에 참석한 최순달 장관은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미국의 자동차 회사도 새로운 모델을 만들면

고장나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가 그 어려운 교환기를 처음 만들어 이 정도 고장나는 거야 고치면 되

는 것이지 무슨 문제냐』며 동행한 양승택 단장에게 고장 부분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개발에 소극적이던 한국통신 측은 장난감에 불과한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평하였

고, 연구소 측은 고장은 있었지만 성공작이라 하였다. 실제로 연구소 측은 1982년 7월부터 1983년 12

월까지 시험 운용을 했는데, 몇 가지 문제점이 대두되긴 했으나 통화를 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비록 시험 운용이긴 하지만, 최신 방식인 시분할 전자 교환기로서는 최초로 개통된 이 교환기에 고유

의 이름이 없었다. 개통식에 참석했던 최순달 장관·백영학 소장·경상현 선임부장·양승택 단장 등이 관

심을 갖고 연구원들과 함께 작업에 들어 갔는데, KTX·KTD 등이 검토되다 Korea를 빼는 쪽으로 의견

이 모아져 TDX(Time Division Exchan-ge)로 명명되었고, 송전우체국의 3차 시험기는 TDX-1X로 명

명되었다. X는 Experimental 즉 시험기를 의미하여 상용화될 경우 TDX-1이 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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