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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증언」
한국 전자정보산업 이면사


Ⅴ. 반도체 산업
第5話 한국반도체 설립 ①


쌍용 프로젝트

Hogan이 실리콘 밸리로 떠나던 1968년 여름이었다. 쌍용 그룹의 조해형(趙海衡) 사장(현 나라홀딩

스 회장)이 식구들과 함께 피닉스의 강기동 박사 집에 휴가차 찾아 왔다.

얼마 전 보스턴 대학에 있는 장유상 교수가 강 박사를 만났을 때 조해형 사장이 보스턴에 있다고

소식을 들려 줬다. 장 교수와 조해형 사장·강 박사는 모두 경기 49회 동창으로 일찍이 미국에 유학 온

친구들이다.

장 교수는 『해형이가 MIT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쌍용 그룹의 기획조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네. 쌍용

의 김성곤(金成坤) 회장이 해형이의 장인일세』라고 말했다. 강 박사는 조 사장에게 한 번 만나자고

연락했다.

MIT는 하버드 대학과 함께 미국 동부에 있는 세계 일류 대학으로, 이 대학의 링컨 연구소에서 2차 세

계대전 당시 마이크로 웨이브·레이다 등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여 전자 공업의 메카로 알려졌다. 반도

체 역시 초기엔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조해형 사장을 만나고 나니 아무런 사전 설득이 필요 없었다. 그는 반도체에서 한 발 더 앞서 전자공

업 전반의 보다 큰 앞날을 내다 보고 있었다.

강 박사와 쌍용의 조해형 사장은 한국에 반도체 제조 공장을 하루 속히 건설하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강 박사는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고, 곧바로 계획을 마련하여 우선 해야할 것부터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가장 큰 걱정은 어떻게 강 박사 본인과 모토롤러를 차단하는가였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웨이

퍼 패브리케이션) 뿐아니라 전자공업 자체가 황무지인데, 그가 모토롤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서

트랜지스터/ IC를 만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 모토롤러 기술을 유출한 것이 너무도 명백

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가는 길

법적 문제는 처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완료되고 제품이 나와 판로를 개척해서 팔기 시작

할 때, 아니면 좀더 늦게 제품이 나와 이 제품이 들어 간 더 큰 제품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가 법적 문

제 제기의 적기이다. 왜냐하면 처음 제품의 제작 회사와 그 고객까지를 모두 포함시켜 고소할 수 있으

므로 보상이 몇 배로 커지기 때문이다.

강 박사는 하루 속히 모토롤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는 가능한 한 늦게 가야하고, 되도

록 강 박사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제품이 실패작이면 그 것으로 끝날 수 있으나, 크게

성공하면 무서운 경쟁 시대에 경쟁 상대 회사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시장 침투를 막으려 할 것이다.

한국은 최첨단 기술 도입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술 도입 성공시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경험한 사람

이 그 당시엔 없었다. 그러나 강 박사는 모토롤러에 근무하는 동안 기술 유출에 대한 회사 측 대응, 비

밀 프로젝트 운영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조치 등을 체험한 바 있었다.

강 박사는 그가 갈 회사를 찾아 나섰다. 한국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는 회사를….

강 박사는 Hogan의 페어차일드행을 이용키로 하였다. Hogan의 전직은 반도체 업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따라서 모토롤러에서는 그를 지켜 보며 대응하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강 박사가 모토롤러를 떠나기에는 아주 좋은 시기였다. 그는 모토롤러에서 종이 한 장 갖고 나오지 않

았다. 없었던 프로젝트 이후 그는 미 국방부에서 Secret Clearence(비밀문서 취급 허가)를 받고 있었

고, 그 동안의 경험도 있어 비밀문서는 100% 피하도록 했다. 그는 건초열을 구실로 하여 실리콘 밸리

로 간다고 하였다.

그가 처음 피닉스로 왔을 때엔 광대한 땅이 온통 황무지였고, 나무라곤 큰 키의 야자수들이 주종이었

으나, 그 후 인공 수로(운하)가 건설되면서 오렌지 나무, 목화밭들이 8년 동안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1년 내내 꽃이 피어 화분으로 인한 고통이 갈 수록 심해졌고, 그래서 건초열은 거듭 악화되었다.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나다

반도체 기술 초창기에 강 박사는 Hogan을 따라 가지 않고 한국 반도체 프로젝트를 위해 주류(主流)

를 벗어나 작은 지류(支流)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선 Stewart Warner

Semiconductor로 직장을 잡았다. 본사가 시카고에 있고 자동차 계기, 군 통신 장비를 만드는 회사

로, R·TL- D·TL을 제조하여 자체에서 쓰고 남는 것을 일반 시장에 팔고 있었다.

이 회사는 모토롤러 기술과 경영 방식을 도입하려는 생각에서 강 박사를 채용하고 부사장직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강 박사는 마음 속으로 1년 후에는 한국으로 떠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 중책을 맡아

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엔지니어링에만 전념하겠다고 하여 행정 책임이 적은 기술이사 직을

맡기로 했다. 이 회사에 새로운 생산 라인을 설치하기로 들어갈 때 약속했다. 이 곳이 한국으로 가는

전초 기지가 되는 것이다.

조해형 사장이 한국에 건설하는 반도체 공장의 공장장 감으로 손명원(孫明源) 씨를 스카웃하여 서니

베일로 보내 주었다. 후일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한 손 씨는 건축공학 전공 설계사로 영어도 유창하

고 성격이 아주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 제독을 지낸 손원일 장군이다. 그 당시 실리콘 밸리엔 한

국 사람이 거의 없어 한국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손 씨는 늘 샌프란시스코의 강 박사 집에 찾

아 와 식사도 하고, 앞으로 건설할 한국 반도체 공장 설계를 상의하곤 하였다.

강 박사는 일하는 목표가 확실해졌다. 지난 10여 년 간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한 모든 것이 낭비 하나

없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위해서였다. 공장에 설치할 시설재 명세서도 뽑았다. 기술 발전이 빠른 반

도체 특성을 고려하여 시설재 최종 선정은 스튜어트 워너에서 일단 설치 운영한 후 결정할 작정이었

다. 즉, 미국서 완전히 시험운전을 마치고 똑같이 카피하여 한국에서 설치키로 한 계획이다.

한국에 함께 나가게 될 핵심 인물로 Terry Martin을 뽑았다. 미국 전자화학학회 모임에서 자주 만났는

데,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일하고 있는 반도체 생산 테크니션이었다. 서부로 오기를 희망하고 있어

엔지니어로 승격시켜 서니베일로 데려 왔다. 그는 아주 유능한 반도체 패브리케이션 엔지니어가

됐고, 박사는 모토롤러에서 개발된 기술을 다시 그에게 주입시켜, 그들의 손으로 새로 개발하는 것

같이 만들었다.

김성곤 회장의 수난

스튜어트 워너는 반도체 부문을 강 박사에게 맡기겠다고 하였다. 강 박사는 가능한 한 피하여 우선

C-MOS 생산 기술을 확립하고, 안전 벨트를 매지 않으면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seat belt

interlock system을 개발키로 했다. 자동차에 사람이 타기 전부터 안전 벨트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C-MOS 기술이 여기에 적합했다.

쌍용의 조해형 사장이 최종 계획서 작성을 위해 서니베일로 온다고 연락이 왔다. 예산 규모·스케줄

등을 곧 결정해야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시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문제가 생겨 방문 계획을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장인 김성곤 의원이 중앙정보부에 잡혀 갔다는 것이다. 조 사장은 일단 계획을 유보

하고 좀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쌍용의 이 계획은 사실상 이것으로 끝이 났다. 강 박사는 한 평생의

과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람 좋은 손명원 씨는 샌프란시스코의 저팬 타운에 있는 가라오케 바를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강

박사가 손 씨와 함께 이 바엘 간 일이 있다. 이 때 일본 엔카 사사메 유키(細雪)가 화면에 여러 번

나오고 있었다.

피닉스와 달리 여기엔 한국 사람들이 좀 있었다. 김성곤 의원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옆에 앉은 사람

이 『한국에선 최근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한 오치성(吳致成) 내무 장관에 대해 야당이 부신임안을 결

의했는데, 이 때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이 다수 야당 편을 들어 난리가 났습니다. 즉, 이는 박 대통령

주변에서 추진하는 3선 개헌안에 대한 반대 세력의 결집을 뜻했기 때문이지오』라고 말했다. 국회

에서 작은 쿠데타가 발생한 셈이었다. 이른바 3선개헌 파동이다.

이 때 공화당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던 김성곤 의원이 주모자로 잡혀 가서 콧수염을 하나씩 뽑히는 등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미국에서 사는 한 사람의 엔지니어가 한국의 정치 풍랑에 이처럼

직접 영향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 후 손명원 씨도 떠나고 조해형 사장도 멀어졌다. 강 박사는 다시 스튜어트 워너 일로 되돌아

왔다.

대만으로 가다

간부회의에 월말 재정보고가 올라 왔다. 앞으로 DTL/TTL 가격이 더 내려가면 적자를 면치 못하리

라는 결론이었다. 강 박사가 들어 와 플래스틱 패키지를 개발했으나, 아직도 많은 양이 비싼 재료를

쓰는 세라믹 패키지여서 더 이상 코스트 삭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강 박사는 조립 분야를 해외로 내 보내자고 제의했다. 인건비가 절반으로 줄면 당분간 적자를 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모토롤러에서 한국의 어셈블리 공장 건설에 참여했었다고 말하고, 한 번

해외 현지를 살펴 보자고 했다.

강 박사로서는 한국행 반도체 사업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던 터라 동남아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도

갖고 싶었다. 결국 그와 프로덕션 매니저가 함께 대만·필리핀·싱가포르를 한 바퀴 돌아 보기로 했다.

홍콩은 이미 인건비가 올랐고, 한국은 잘못하면 그의 계획이 알려질 수도 있어 제외시켰다.

출발 이틀 전에 프로덕션 매니저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하여 강 박사 혼자 떠나게 됐다.

대만에 도착하여 안내원을 따라 타이추(台中)에서 내려 신추(新竹) 공업지대로 안내되었다. 넓은

농지에 필립스 TV 브라운관 공장이 하나 서 있었다. 여기서 교통대학 교수들을 몇 사람 만났으며,

트랜지스터/IC를 제조하고 싶다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스튜어트 워너로서는 직접 투자를 할 생각은 없었고, 어셈블리를 하고 있는 회사와 하청 계약을 맺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Unitron 이라는 회사가 이미 소규모 어셈블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건은 미국에서 본딩 머신을 제공하기를 바랐고, 스튜어트 워너 역시 서니베일의 시설을 옮기면

되었다.

다음 날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여기도 대만과 같이 무더운 날씨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 놀란 것은 비행장에 불이 나 임시 천막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얘기인 즉, 비행장 건설

감사가 나온다고 하여 아예 증거를 없애기 위해 비행장 건물을 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호텔에서도

할 일 없는 많은 청년들이 로비를 점령하고 있었다. 정이 떨어져 호텔 룸에서 몇 사람 기업인들을

면담하는 것으로 끝냈다.

결국 Unitron에 어셈블리 하청을 주기로 하고, 프로덕션 매니저에게 실무를 맡겼다.

초조해진 마음

플래스틱 패키지에 문제가 있어 강 박사는 수 개월 후 다시 대만을 방문했다. 이 때 반도체 트랜지스

터/IC 생산 공장에 관심이 있는 대만 기업인을 정식으로 만났다. 강 박사는 이 프로젝트가 스튜어트

워너와는 무관하고, 그가 혼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임을 분명히 했다.

대만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의사소통 문제였다. 그 곳의 고위 경영인들은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에는 항상 상반된 이해관계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성실한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통역을 통한 설득이란 제대로 될 수 없다. 외교 관계에서는 단어 한 개의

의미를 갖고도 트집을 잡고, 심한 경우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만 어셈블리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시카고 본사에서는 서니베일 공장을 아예 팔 생각을 하고

있는 것같았다. 계속 IC 값이 내려 가고 또 더 좋은 IC가 나오는데, 자체 생산은 비경제적이란 것이

었다. 강 박사의 눈에도 그 방향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그가 하는 C-MOS 프로젝트에도 재정

지원이 제대로 안되고 있어 강 박사는 스스로 갈길을 빨리 정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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