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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헌 음악칼럼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에

금년(2009년)이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이 탄생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다. 생전이나 사후에나, 아마 그만큼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심했던 음악가는 음악사 상 드물지

않았겠는가 싶어 기념의 해에 그를 살펴 보기로 했다.

그의 풀 네임은 「야콥 루드비히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로 어지간히 긴데, 그의 가계도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복잡하다.

멘델스존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주지하다시피 수천 년 전에 나라를 잃은 유태인

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헤아릴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의 고난을 버텨온 민족이다. 특히 독일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영욕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잡다기하다.

그러나 펠릭스는 유태인으로선 드물 정도로 복 받은 집안에 태어나, 38년이란 짧은 생애였지만, 생전

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적인 일생을 마친 음악가이다. 조부 모제스 멘델스존은 독일 내

뿐만아니라 전유럽에 이름난 대철학자였으며, 부친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은행가로 대성하여 부유한

일가를 꾸려가는 초석이 되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못 되었다.

아들 펠릭스가 음악가로 대성하여 전유럽에 이름을 날리게 된 후 아브라함은 자조 섞인 다음과 같은

푸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라고 불렸고, 나이 들어선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니, 나는 모제스와 펠릭스를 잇는 하이픈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럴싸한 익살이다.

아브라함이 프랑스 파리에서 은행가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레아 잘로몬을 알게 되어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의 조부는 베를린에서도 으뜸 가는 자산가로 큰 공장을 경영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재정 고문까지 맡았던 사람이었으니, 일가의 재정이나 문화적 환경은 말할 수 없이 훌륭하였고, 펠릭

스의 자질은 어머니 쪽, 즉 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 많았으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레아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첫째가 딸 화니이며 어려서부터 악재를 보

여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도 능하였고, 둘째가 우리의 펠릭스이다. 셋째가 레베카로 그녀는 성악에 소

질이 있어 노래를 잘 불렀다. 넷째는 아들 파울, 첼로를 잘 켰다.

돈 많고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부모는 자택에 오키스트라까지 고용하여 일요일 오전에는

멘델스존가에서 음악회가 열렸고, 유럽의 지성계·사교계 명사들도 많이 초대되어 문화적 향연을 즐겼다.
네 남매도 그 연주회에 참가하였고, 펠릭스는 지휘와 피아노를 맡았으며, 그의 초기 작품 중에는 그

가정음악회를 위한 작품들도 많았다.

상술한 네 명의 남매 중에서 음악사에 기록된 사람은 화니와 펠릭스 두 사람이다. 화니는 결혼한

후에도 작곡을 계속하면서 자기 작품이 출판되기를 원했으나, 동생 펠릭스는 『여자는 어린애를

낳고 가정이나 잘 돌보면 됐지 작곡은 무슨 작곡이냐?』고 극구 말렸기에, 하는 수 없이 남동생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한 작품도 꽤 많아, 오늘날에 와서야 진짜 작곡가가 밝혀져 가고 있다.

거개의 작곡가가 넉넉지 못한 집안에 태어나 평생 빈곤 속에서 작곡했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높은

교양과 점잖은 행실을 지키면서 자란 펠릭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가 한참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일종의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했으며, 더욱이 반유태적

감정이 강한 베를린에 사는 유태계 부호였기에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주제넘게 나서기를 자제하면

서 아무한테서나 호감을 사는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오히려 그런 점이 모처럼의 음악적 천재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면서도 당초에 촉망되었던 창조적인 일

을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입이 험한 평론가들은 멘델즈존의 작품은 『낡은 틀

에서 벗어나지 못한, 쓰레기통에 버려도 아깝지 않은 고물딱지』라는 혹평까지도 했다.

그러나 초연되고 나서 약 100년 동안이나 사장되어 있던 J.S. 바흐의 교회음악 대작 「마태 수난곡」

이 1829년 20세의 청년 멘델스존에 의해 소연(蘇演)되어 오늘날에는 음악 예술의 보물같은 명곡이 되

었음은 멘델스존의 치적 중에서도 큰 공적으로 남아 있으며, 거꾸로 비유하자면 그는 쓰레기통에서

보석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멘델스존은 작곡이나 지휘, 연주 활동은 물론, 보태어 1842년 그의 나이 33세 때에는 라이프치히 음악

원을 설립, 그와 로베르트 슈만이 작곡과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교수진에는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작품 64」를 초연한 당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이었던 페르디난트 다

비트도 바이올린부 담당으로 있었다.

펠릭스의 양친 아브라함과 레아는 정통 유태교도는 아니었고, 어린이들을 「멘델스존-바르톨디」라

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여 개종시켰다. 어머니 레아의 남동생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얻은 「바르

톨디」라는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

독일계 유태인들은 일단 기독교로 개종하면 순수한 독일인보다도 더 한층 독일적이 되려고 노력

했다. 그러기에 멘델스존은 자신을 유태인이라기보다 독일인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긍지로 삼았으

며, 철학·과학·예술에 있어 독일인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애국자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세워진 후로는 조금이라도 유태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은

처형시키거나 추방해 버렸으며, 100년 전에 타계한 애국자 멘델스존의 작품도 연주를 못하게 하였

고, 라이프치히에 서 있던 멘델스존의 입상도 파괴해 버렸다.

생전, 사후 숱한 영화와 수난으로 점철된 멘델스존도 20세기 후반부터 금세기, 특히 기념의 해 금년에

는 그의 예술성이나 업적이 포지티브 방향으로 굳어져 감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멘델스존은 철학·문학·언어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재사였는데, 보태어 화가의 소질도 풍부하여

특히 그의 풍경화는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유명한 관현악 서곡 「핑갈의 동굴」은 그가 스코틀랜드에 연주 여행을 갔을 때 헤브리디스

제도의 무인도 스태파 섬에 있는 핑갈의 동굴을 방문하여 풍경 화가로서 깊은 영감을 받고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일러스트는 외지에 실린 그 동굴의 사진을 필자가 복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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